우리 형님이 그러더라. 엄청시리 큰 밥솥이 있어가 그걸로 물을 끓여갖고 전기를 맨든다꼬. 형님이 그러더라. 저 밥솥 때문에 우리가 호강하고 산다꼬. 점마 덕에 우리나라가 부자 나라가 될 기라꼬. 억수로 고마운 밥솥이라꼬.”

한국 최초의 원전 재난영화로 알려진 영화 <판도라> 앞부분에서, 바닷가로 놀러나온 아이들은 원자력발전소(원전)를 바라보며 ‘밥솥’이라고 말한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주민들은 좋은지도 나쁜지도 모른 채 “국가가 한다”니까 그러려니 원전 건설을 받아들였다. 건설 초반 마을에 사람도 북적이고, 돈이 풀리자 주민들은 원전이 마을의 밥솥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원전 고리 1호기가 가동된 뒤 세계는 미국 스리마일섬(1979년), 소련 체르노빌(1986년), 일본 후쿠시마(2011년) 등 최악의 원전 사고를 겪는다. 한국 역시 잦은 원전 고장과 사고, 납품 비리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밥솥에 ‘위험시설’ ‘혐오시설’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수명을 다한 원전이 나오기 시작했다. 위험시설을 안고 산다는 이유로 해마다 지원되는 정부와 원전 사업자의 지원금에 의존하던 지역에 공포가 찾아왔다. 공포는 다시 의존을 부른다.

원전 주변 밖에선 탈원전 정책을 놓고 찬반 논란이 계속되지만 원전 주변에 사는 이들은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늘도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한다. 원전이 멈춰도 핵폐기물 처리와 폐로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원전을 끌어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11월17~18일, 11월20~21일 운전을 멈춘 부산 기장군 고리 원전 1호기와 경북 경주 양남면·양북면·감포읍 등 월성 원전 1호기 주변에 사는 이들을 만났다. 이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봤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위험시설을 낙후된 지역에 몰아넣고 전기를 쉽게 사용해온 역사와 연결된다. ‘원전의 숨겨진 비용’을 애써 외면해온 우리 사회가 이제는 미뤄둔 숙제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경주=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부산=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원전 폐쇄 두고 지역경제 침체 위기 호소하는 고리·월성
지역경제 발전 간데없고 눈먼 돈에 발목 잡힌 마을의 비극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고리원자력발전소 풍경. 조윤영 기자

11월15일 오후 5시께 경북 경주 양남면 나아리 나아해변엔 어스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산책 나온 엄마, 힘이 넘치는 커다란 개의 목줄을 쥐고 끙끙대며 따라가는 아저씨, 동네 마실 나온 어르신들. 철썩대는 파도와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들을 감싸안았다. 여느 바닷가 마을과 다를 것 없는 풍경이라는 생각도 잠시, “제한구역 알림. 본 지역은 원자력안전법 제89조에 따라 제한구역(EAB)으로 설정된 지역으로 일반인 출입 및 거주를 통제하는 지역입니다. 월성원자력본부장”이라 쓰인 표지판이 눈에 띈다. 바다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우뚝 솟은 월성원자력발전소(월성 원전)와 널찍하게 뻗은 도로는 이곳이 여느 바닷가 마을과 다르다고 알려준다.

“모르겠어요. 가동하면 좋지. 그 방폐장은 문제고. 딴 데서 자꾸 (핵폐기물을) 가져온다는데…. (월성) 1호기는 돌리면 좋지. 나도 저기서 10년 넘게 청소일 하고 나왔는데 설비를 얼매나 했노. 새로 돌린다고 싹 다 했지. ”

20여 년 전 월성 원전 3·4호기를 세울 때 이 마을에 정착했다는 ㄱ(70)씨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에 대해 “사람이 바글바글했다”는 과거를 떠올리며 월성 원전을 바라봤다. “위험한지 몰랐지. 일본 (원전) 사고 나고 포항과 경주에서도 지진 나고. 지진 났을 때는 흔들흔들, ‘와 이카노, 와 이카노’ 했지. 이제 여기가 젤 위험한 지역이라고 알지.” 그럼에도 그는 “그런 거라도 하나 있어야 사람이 왔다 갔다 한다. 여기 볼 게 뭐 있냐”며 월성 원전이 계속 돌아야 한다고 했다. “땅도 내놔도 안 팔리지. 누가 살려고 하겠어요. 내 나이 칠십 넘어서 우리야 여기서 죽으면 죽는 건데…. 그래도 어떨 때는 딴 데 가서 살고 싶지.”

ㄱ씨의 복잡한 마음은 월성 원전 소재지 양남면 주민 6526명(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2018년 10월 기준)이 원전을 바라보는 시각의 단면을 보여준다. 좀더 확대하면 월성 원전 5㎞ 이내에 사는 양북면(4475명), 감포읍(5742명), 그리고 10㎞, 20㎞ 안에 수많은 ㄱ씨가 살고 있다. 지난해 6월18일 40년 운전을 마친 부산 기장군 고리 1호기 주변 5㎞에도 ㄱ씨와 닮은 5만5345명(부산 기장군 장안읍·일광면, 울산 울주군 온양읍·서생면)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들의 마음이 복잡한 건, 아름다운 해변과 수산물 말고 가진 것 없는 지역에서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원전과 이에 따라 내려오는 지원금이 파도와 바람 대신 이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ㄱ씨 같은 이들은 앞으로 더욱 늘어난다. 2023년 고리 2호기를 시작으로 설계수명이 다한 원전이 (수명 연장을 하지 않는다면) 줄줄이 영구 정지된다.

지역 주민 의견 무시한 국책사업

“이 법은 발전소의 주변 지역에 대한 지원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전력사업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증진하여 전원(電源) 개발을 촉진하고 발전소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며 지역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원전을 포함해 발전소를 짓는 지역에 대한 지원 근거를 규정한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발주법) 제1조다. 월성 1호기, 고리 1호기 주변 주민들이 처한 딜레마는 이 조항에서 잉태된다. 지역 발전이 ‘전원 개발’(전력 생산을 위해 발전소나 설비를 설치하는 일)과 ‘발전소의 원활한 운영’보다 후순위다. 과거 지역이나 사람보다 ‘국익’을 상위에 두고 진행돼온 국책사업의 기본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전원 개발을 위해 군사정권이 1970~80년대 추진한 고리 1호기, 월성 1호기 건설에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정부가)꼭 필요하다고, 천지개벽한다고 하니까… 주민들은 뭔지도 몰랐죠. 정부가 하는 대로….”(이진곤 양남농협조합장) “기장에서 나는 미역과 다시마, 붕장어는 최상품으로 대접받았어요. 경치도 끝내줬고. 그런데 국가에서 하려는 일을 개인이 반대할 수 없는 시대였어요.”(부산 기장군 장안읍 주민 ㄴ씨·54)

원전 건설 과정에서 일자리가 생기고 지역이 북적거리는 ‘특수’가 불었지만, 곧 원전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고리 1호기의 경우 안전을 이유로 가동 뒤 반경 8㎞ 이내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설정됐고, 주민들의 재산권은 30여 년간 묶여 있었다. 이현만 전 기장군 의원은 “예전에는 개발제한구역이어서 집도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원전 냉각수로 쓰이고 평균 7도가 높은 채 바다로 계속 배출되는 온배수 때문에 어종 생태계가 변하는 것을 보았다. 원전을 떠안은 대가를 하나둘 알게 된 것이다.

정부는 2005년 발주법을 개정했다.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사업자지원사업을 도입하고, 발전량에 따라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바꿨다. 기존 정부기금(전력산업기반기금)으로 지급하던 기본지원사업에 한수원이 집행하는 지원금이 생기고 발전을 계속할수록 지원금을 받는 구조로 바뀌며 지원금 규모가 2배 이상 올랐다. “지원사업의 효과를 높이겠다”는 취지였지만 이는 지역이 원전에 더욱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의 발전소 주변 지원제도는 일본의 제도를 많이 참고했다. 일본도 2003년 전원개발촉진세 원전 주변 지역 교부 기준을 용량 기준에서 전력생산량(발전량) 기준으로 바꿨다. 원전이 있는 일본 이카타의 지역경제를 연구해 논문을 쓴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대학 경제학부 교수는 “발전량 기준은 고장이나 사고가 날 때 정지 기간이 길수록 지원금이 줄어드는 점을 이용해, 원전 가동에 따른 위험에 대한 지역의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의도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전년도 발전량 1kWh당 0.25원×24시간×365일’. 발주법 개정에 따른 지원금 산정 기준이다. 월성·고리 주민들이 ‘목숨값’이라 이르는 돈이다. 이후 ‘목숨값’은 원전 안전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한수원엔 ‘발전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수단이 됐고, 주민들에겐 ‘민-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씨앗이 됐다.

원전을 돌릴수록 목숨값이 높아진다

2007년 6월, 30년 설계수명을 다한 고리 1호기는 한수원과 정부의 결정으로 10년 연장 운전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은 극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국내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는 1978년부터 2007년 6월까지 고장·사고가 125건(원전안전운영정보시스템)으로 당시 전체 20여 기 원전의 고장 건수(602건)의 약 20%를 차지했지만, 한수원과 정부는 안전성 평가 결과 문제가 없다며 수명 연장을 밀어붙였다.

이때도 지역사회를 좌우한 것은 ‘안전’보다 ‘돈’이었다. 한수원은 주민 소통·설득 작업이라고 밝혔지만 당시 5㎞ 이내 마을 청년회에서 일했던 ㄷ(46)씨는 “한수원이 주민들과 단체를 상대로 외국 견학이나 단체 모임·행사 지원, 식사·술 제공 등으로 ‘각개 플레이’를 했다”고 기억했다. 당시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고리 1호기 수명 연장 반대를 외쳤지만 결국 지역주민 대표들은 2007년 12월 특별지원금 1610억원을 받고 연장에 합의했다. ㄴ씨는 “주민들 사이 의견 정리가 잘 안 됐다. 이듬해 정권이 바뀌는데 정부가 ‘이 부분(합의)을 빨리 안 하면 혜택 없어질 수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하려면 수명 연장을 해야 한다. (이주를 요구하던 길천마을의 경우) ‘수명 연장하면 이주 대책을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합의가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주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전 주변 마을 이장 ㄹ(56)씨는 “마을이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이 없다. 공공시설은 군이나 시에서 지원해야 하는데 예산 부족을 이유로 외면한다. 1호기 가동 중단하고 지원금이 줄어드니 힘들다. 이제는 좋은 시설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수익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을 회관, 경로당, 도로 확장 등에 원전 지원금이 쓰이며 사실상 지자체의 재정을 보조하고 있다.

고리 1호기는 당시 월성 1호기의 미래가 됐다. 2012년 11월 월성 1호기의 설계수명은 만료됐지만 한수원과 정부는 2022년까지 수명 연장을 추진했다. 고리 1호기 수명 연장 때의 갈등이 똑같이 되풀이됐다. 주민들은 반발했지만 결국 2015년 6월, 한수원과 월성 1호기 주민 대표 단체인 동경주대책위원회는 ‘상생협력금’이라는 이름의 보상금 1310억원을 경주시와 원전 주변 지역이 나눠 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고리 1호기의 보상금보다 적게 책정된 이유는, 고리 1호기(10년)보다 월성 1호기의 수명 연장 기간(7년)이 짧았기 때문이다. 정작 월성 1호기가 있는 양남면 22개 마을 가운데 17개 마을이 주민 투표에서 반대 의사를 보였지만 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앞서 한수원이 7천억원을 들여 월성 1호기의 핵심 설비를 교체한 가운데 주민들에게는 “지역경제를 위해 보상금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선택지만 제시됐다.

당시 한수원과 합의에 참여했던 신수철 감포읍발전협회 회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안전에 대한 불안은 늘 있었죠. 합의 당시 고민이 됐어요. 상생협력금도 있지만 계속 운전에 따른 지원금도 계산할 수밖에 없었죠. 지역 발전 틀이 거기에 맞춰 짜이는데…. 발전소가 지역 의견과 상관없이 들어왔고, 지역이 그것에 의존하게 됐는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는 사용후핵연료의 포화로 월성 2~4호기가 가동을 멈추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월성 1호기 폐쇄, 440억원 손실 보상 요구

결국 지원금 앞에서 “노후 원전을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양남면발전협의회장을 맡아 월성 1호기 재가동 반대를 이끌었던 이진곤 양남농협조합장은 “중수로는 경수로와 달리 인근 지역의 사람과 채소에 삼중수소가 쌓인다. 그러니 가동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고 말했다. 4년째 월성 원전 홍보관 앞에 농성장을 마련하고 이주를 요구하는 신용화 월성 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안전을 이야기하면 결국 돈 이야기로 흘러간다. 워낙 돈을 뿌려놓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에너지전환 정책을 추진하며 지난 6월 한수원 이사회에서 경제성을 이유로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결정하자 지역은 또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갔다. 열악한 지방재정을 호소하는 지자체가 먼저 총대를 멨다. 경주시는 월성 1호기 가동 중단으로 440억원(지원금+지역자원시설세)의 지원이 줄고, 지역주민 500명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지역은 갈라졌다. 감포읍과 양북면, 양남면 원전 인접 5개 마을(나아리, 나산리, 읍천1·2리, 환서리)이 동경주대책위를 꾸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에 따른 지역 피해 조사와 대책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2년 전 월성 1호기 재가동에 반대했던 양남면발전협의회는 동경주대책위에 참여하지 않고 “1호기 조기 폐쇄에 반대하지 않지만, 사용후핵연료 문제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갈등의 중심에 한수원이 있다. 한수원 5개 지역 본부는 매년 500억원대의 사업자지원금으로 발주법에서 규정한 교육·장학사업, 지역복지사업에 지원한다. 실제로 지원금 대부분이 장학금이나 학교 지원, 지역 소득 증대 사업에 쓰인다. 문제는 원전 운영의 주체인 한수원이 지원금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보니 지원금 집행의 적절성과 공정성 논란이 지역 안에서 계속 제기되는 것이다. 당장 월성 주변 지역에선 지난해 재가동 때 지원하기로 했던 상생협력금 1310억원 가운데 집행되지 않은 예산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한수원이 환수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감포읍발전협의회는 수익사업 명목으로 원룸과 건물 등 부동산을 급하게 샀고, 이것의 적절성 논란이 지역사회에서 벌어졌다. 당시 사정을 아는 월성 원전 주변 몇몇 주민은 “한수원에서 환수될 수 있으니 빨리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지역 발전보다 여론 무마에 쓰이는 지원금

경북 경주시 양북면 도로에 걸린 한국수력원자력 노동조합의 현수막. 이승준 기자

<한겨레21>이 국회를 통해 입수한 ‘최근 5년간(2013~2017) 한수원 지원사업 신청내역 및 심사결과’(지원사업 내역)를 보면 지역의 마을발전협의회, 영농회, 이장단 등의 체육대회, 노래자랑, 축제 등 홍보성·일회성 행사에 지원되는 돈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현만 전 기장군 의원은 “발전소 운영으로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주체가 지원금을 집행하고 있다. 한수원이 지역 여론을 자신의 우호 세력으로 잡아둘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일단 지원금은 보통 각 마을에서 신청한 사업을 주변지역 지원사업 심의지역위원회(지자체, 주민 대표, 한수원, 기초의회 등 참여)에서 심의해서 승인하는 방식인데, 이에 대해 기장군 주민 ㄷ씨는 “결국 눈먼 돈, 임자 없는 돈”이라고 꼬집었다. 김형칠 기장군 장안읍 길천마을 추진위원장은 “제도를 악용해 마을에 사무실을 차리고 ○○봉사단체 간판을 달지만 실제 활동하지 않는 부적합한 단체들도 있다”고 말했다. 소액의 비품 구매나 소모성 장비 구매 등 온갖 민원성 요청이 올라와 이를 거르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지역 사회가 굴러가는 모든 비용을 한수원에게 청구하는 구조가 고착화 된 것이다.

지원금 중 한수원이 자체 집행하는 ‘현안해결 및 여건변동 지원사업’ ‘부대사업비’ 항목(고리원전본부의 경우 매년 6억~8억원, 월성원전본부 매년 3억~4억원)에 대해 지역에서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다. 양남면 주민 ㄹ(64)씨는 “한수원이 자체 집행하는 돈이 마을 행사 지원비나 협찬금으로 쓰이는 것으로 안다. 특히 마을 대표들에게 쓰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한수원 5개 원자력본부는 11월5~23일 각 지역의 주민들에게 원전에 대한 주민 의견을 조사했다. 그런데 월성 원전 주변 주민발전협의회와 마을 이장 등에게 “수용성 설문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설문조사는 단순히 5개 원자력본부 간의 평가를 위한 내부 평가로 활용되니 설문 내용과 다소 부합되지 않더라도 월성원전본부가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매우 그렇다’는 답변으로 설문에 응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이 배포됐다. 5개 본부 내부 평가용이라고 하지만 주민 여론을 왜곡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만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수원 월성원전본부 관계자는 “외부에 발표하지 않는 내부 평가로 월성 원전이 지역사회 공헌과 봉사활동에 지난 1년간 열심히 해왔으니 이를 격려해달라는 차원일 뿐”이라고 밝혔다. 사업자지원사업에 대해서도 “한수원이 자체적으로 집행하는 사업은 지원금 중 작은 부분이고 절차에 맞춰 집행된다”고 말했다.

한수원 설문조사, 주민 여론 왜곡 논란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주민들에게 원전 안전성 등을 묻는 여론조사를 하는 가운데 월성원자력본부가 지역주민 대표들에게 배포한 유인물. 이승준 기자

원전 가동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원전 지원금의 중요성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지역주민들은 원전에 의존할수록 지역경제와 자신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다고 인식했다. 원전에 대해 “지역 성장 동력을 빼앗아간 존재”(기장군 장안읍 주민 ㅁ씨·63, “지역을 묶은 쇠사슬 같은 것”(기장군 장안읍 주민 ㄴ씨) 등으로 표현하는 이가 있었고, “외부에서 보상금 받아서 좋지 않냐고 할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경주 양북면 봉길리 주민·60)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동경주대책위에 참여하는 홍중표 양남면 나아리 이장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로 보도될 때마다 인접 지역은 피해를 본다. 여기는 사람이 사는 동네다. 외부에서는 금전적 요구만 하는 이상한 사람들로만 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법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각양각색이지만 이들이 바라는 것은 원전이 폐쇄된 뒤에도 지역주민의 소득이 늘어나는 사업들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지원제도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은 언제나 소수의견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일단 안전해야 외지인들이 들어올 거 아닙니까. 여기 와서 전원주택도 짓고 회도 먹고 그래야 상권이나 사업이 발전하는데…. 지역 발전을 위해서라도 안전성을 강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백민석 양남면 발전협의회 회장)

이러한 현실은 원전 가동이 멈춘 뒤까지 염두에 두고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에 초점을 맞추는 프랑스와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는 원전 주변 지역 지원제도를 별도로 운영하지 않고 지자체나 주민들에게 돈을 직접 지원하지 않는다. 대신 원전으로 확보한 지방 세수를 중·장기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 주민들의 동의를 구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원전 지역인 프랑스 플라망빌시를 방문한 뒤 작성한 보고서(2014년)를 보면, 플라망빌시 관계자는 “원전이 모두 폐쇄될 경우를 대비해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재투자에 역점을 두고 있다. 원전이 폐쇄돼도 지역이 살 수 있기 위해서 원전이 없는 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부 지역 주민들과 전문가들은 지역주민·지자체·외부인사 등이 참여하는 ‘제3의 기구’에서 각종 지원사업을 통합해 돈을 관리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제3의 기구가 지역의 중·장기 발전 계획을 세우고 돈을 체계적으로 쓰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원금 사용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다.

‘제3의 기구’, 지역별 에너지재단 구성 검토

주무 부처인 산자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현행 지원제도의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산자부는 지난 6월 ‘에너지전환(원전 부문) 후속조치 및 보완대책’을 발표하며 “원전 주변 지역 지원제도를 그간의 민원사업 및 SOC 중심에서, 지역 발전 계획과 연계한 주민 소득 증대 사업 중심으로 개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자부는 이를 위해 연구용역을 통해 지역별 ‘에너지재단’을 구성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기본지원사업·사업자지원사업·지역자원시설세 등 원전 주변 지역에 들어가는 돈을 주민과 지자체,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별도 기구인 ‘에너지재단’에서 통합 관리하고 ‘종잣돈’을 바탕으로 지역의 중·장기 발전 계획을 세우게 하자는 구상이다. 그동안 지원사업을 주도하던 산자부와 한수원도 권한을 에너지재단에 넘기는 것이다. 정종영 산자부 원전산업정책과장은 “지역경제를 위해 원전 의존형 경제구조에서 다원화된 구조로 가야 한다”며 “현행 지원제도는 아무리 철저히 관리해도 예산의 중복과 비효율성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 결국 근본적인 틀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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