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에 무너지는 '원전 생태계' 르포


"원전 수출한다고요? 쇼하지 말라고 해요. 캐딜락 단종한다면서 사라면 누가 사나요."

지난 28일 오후 경남 창원시 의창구 팔용동. 원자로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 가공업체인 범성정밀 김동명(53) 대표는 "신고리 5·6호기에 들어갈 마지막 물량 작업을 하고 있지만 내년 1~2월 납품이 끝나면 일감도 없고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1년 넘게 진행되면서 우리나라 원전산업 생태계 붕괴 우려가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납품 끝나면 일감 제로

범성정밀은 한때 직원 25명, 연 매출은 30억원이었다. 지금은 절반 넘는 직원을 내보냈다. 매출도 3분의 1로 줄었다. 신규 원전 6기 건설 백지화, 노후 원전 수명 연장 금지 등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문 정부 출범 이후 2015년 '7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 따라 새로 짓기로 했던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은 중단됐다. 현재 40% 정도 공정을 보이는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끝나면 신규 원전 건설이 없어 일감 절벽에 맞닥뜨린다.

국내에서 탈원전을 추진하는 문 정부는 원전 수출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다. 28일 문 대통령이 원전 건설을 추진 중인 체코까지 찾아가 원전 세일즈에 나섰다. 김 대표는 "대통령이 체코인지 뭔지 갔다던데 당장 일감이 없어 죽을 판인데 무슨 수출 타령이냐"고 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원전 수주전에 뛰어들었지만 수주 자체가 불확실한 데다 수주를 해도 2025년 이후에나 착공이 가능하다. 아무리 빨라야 7년 후인데 그때까지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자식 같은 기계 팔아… 줄도산 위기

창원의 다른 원전 가공업체인 영진테크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가 장비가 늘어선 공장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강성현(55) 대표는 "1억9000만원을 주고 샀던 선반이 있던 자리였는데 지난달에 8000만원 받고 팔았다"고 했다. "일감은 없고, 월급 줄 돈은 없으니 기계를 내다 파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자리 있던 선반, 내다 팔았죠” 28일 경남 창원시 의창구에 있는 원전 부품 가공 업체 영진테크윈에서 강성현 대표가 대형 선반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일감이 끊겨 직원들 월급조차 주기 어려워진 그는 지난달 선반을 헐값에 내다 팔았다.
“이 자리 있던 선반, 내다 팔았죠” - 28일 경남 창원시 의창구에 있는 원전 부품 가공 업체 영진테크윈에서 강성현 대표가 대형 선반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일감이 끊겨 직원들 월급조차 주기 어려워진 그는 지난달 선반을 헐값에 내다 팔았다. /김동환 기자


강 대표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은행의 대출금 상환 독촉장이었다. 강 대표는 정부가 신한울 3·4호기 등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잇따라 내놓자 은행에서 70억원 자금 대출을 받아 설비를 늘렸다. 설비가 없으면 입찰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정부 들어 신규 원전 건설이 백지화하면서 고가 장비들은 무용지물이 될 처지다. 대출금은 아직 12억원가량 남았고, 당장 연말까지 4억6000만원을 갚아야 한다. 김 대표는 "은행들은 귀신같이 회사가 어려운 걸 알고, 득달같이 대출금 회수에 나선다"고 했다. 그는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돼 설비를 내다 팔고 있다"며 "자식 같은 기계 파는 가슴이야 찢어지지만, 직원들 떠나면 기계가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야적장에 쌓인 신한울 3·4호기 부품

탈원전 정책 이후 중소 원전업체만 힘든 게 아니다. 창원시 성산구 두산중공업 야적장엔 벌겋게 녹이 슨 자재가 잡초가 듬성듬성한 벌판에 쌓여 있었다. 건설이 백지화된 신한울 3·4호기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자재다.

벌겋게 녹슨 부품 - 28일 경남 창원시 두산중공업 원자력 공장 옥외 작업장에 신한울 원전 3·4호기 원자로와 증기 발생기에 들어갈 부품들이 벌겋게 녹이 슨 채 쌓여 있다. 두산중공업은 2015년 11월 한국수력원자력의 승인을 받아 신한울 3·4호기 원자로 제작에 착수했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작업이 올스톱됐다.
벌겋게 녹슨 부품 - 28일 경남 창원시 두산중공업 원자력 공장 옥외 작업장에 신한울 원전 3·4호기 원자로와 증기 발생기에 들어갈 부품들이 벌겋게 녹이 슨 채 쌓여 있다. 두산중공업은 2015년 11월 한국수력원자력의 승인을 받아 신한울 3·4호기 원자로 제작에 착수했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작업이 올스톱됐다. /김동환 기자


한국수력원자력과 두산중공업이 맺은 계약에 따르면 이 부품들은 진작에 가공 작업에 들어갔어야 했다. 정인호(56) 두산중공업 원자력공장장은 "2012년쯤 주문이 한창 몰릴 때는 작업장 공간이 비좁아 250m였던 공장을 395m로 증축했다"며 "지금은 신고리 5·6호기에 들어가는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한빛 원전 3·5·6호기에 들어가는 교체용 증기발생기 제작 작업만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두산중공업 역시 일감이 사라진다.

한수원이 자유한국당 최연혜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두산중공업이 신한울 3·4호기 부품 제작에 투입한 비용은 4951억원에 달한다.

최 의원은 "정부의 무리한 탈원전 정책 밀어붙이기로 원전 생태계가 무너지고,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에 따른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며 "원전 생태계를 유지하려면 불확실한 수출보다 당초 계획대로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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